箕子 관련 商周靑銅器 銘文과 箕子東來說(박대재, 한국사연구실 실장, 한국사학과 교수)
2010.07.26 Views 1893
논문제목: 箕子 관련 商周靑銅器 銘文과 箕子東來說
논문저자: 박대재(한국사연구실 실장, 한국사학과 교수)
출판사항: 先史와 古代 32집, 한국고대학회, 2010년 6월
초록
1973년 중국 遼寧省 喀左縣 北洞村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기후(㠱侯)’ 명문에 대해 중국학계 및 국내학계 일부에서는 箕子東來 및 箕子朝鮮의 고고학적 증거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喀左의 ‘㠱侯’명 청동기는 箕子집단의 이주 내지 건국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西周 초기(기원전 1000년 전후) 북경일대의 燕國이 객좌지역에 단기간 진출하였다가 남긴 ‘燕國靑銅器’의 일종이다. 북경 琉璃河고분 등 서주 초기 燕國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에서는 ‘㠱(箕)’族뿐만 아니라 객좌일대에서 출토된 殷유민의 族氏 명문이 다수 확인되는데, 이는 이들이 서주 초기 燕國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유민 집단이었음을 시사해준다. 燕國의 청동기 명문에서 商代의 유력 족씨였던 ‘㠱’족이 보이는 것은, 商 멸망 후 箕族이 북경일대로 이주 정착하여 燕侯의 지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객좌일대에서 燕侯 및 그 예하 殷유민 족씨집단인 㠱‧微‧伯矩‧魚(圉) 등의 명문 청동기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 燕國 세력이 진출했던 것은 인정되지만, 이 지역의 토착문화(魏營子文化)를 변경한다거나 또는 중원으로부터 주민을 식민할 정도의 장기적인 것이 아니라 단기적인 진출이었다고 이해된다. 기원전 1000년 전후 객좌일대에 진출했던 燕國 세력은 곧이어 燕國 북쪽지역의 유목민족인 山戎의 흥기와 기후의 갑작스러운 한랭건조화로 인해 이 지역에서 후퇴하게 되는데, 大凌河유역에서 서주 중기 이후 중원식 청동예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